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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동물들은 제 투영체이죠
[PEOPLE] 일러스트레이터 전필화 님을 만나다
by Bean2022.05.30
내 방 한 켠에는 일러스트 그림들이 가득하다. 방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데 그림 만한 것도 없어, 나는 자주 일러스트 페어에 방문해 방 컨셉을 바꿀 생각을 한다.
어떤 작가들이 참여하는지 미리 인스타로 보고 있던 중, 내 맘에 쏙 드는 작가를 한 명 발견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전필화 님.
그의 작품들은 감정을 극도로 절제한 무표정한 표정과 위트있는 코멘트, 하나부터 열까지 ‘시크’ 그 자체였다.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며 제목을 상상해 보고, 작가의 코멘트와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홀로 그림을 통해 내적 친밀감을 쌓았던 터라 전시회에서 만난 필화 님에게 나도 모르게 마치 동창을 만나듯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뜬금없이 건낸 포블스 인터뷰 제안에 수줍게 응한 그.
며칠 뒤 연희동 한 카페로 필화 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나섰다. 소녀처럼 들떠서는…
Q. 안녕하세요~ 필화 님. 이름이 무척 인상적이에요. 혹시 필명인가요?
많은 분들이 필명이라고 생각 하시는데 본명이에요. 반드시 필(必)에 화목할 화(和)를 가진 이름입니다. ‘반드시 화목하라’ 라는 이름이에요. ㅎㅎ
Q. 인스타를 보니 동물과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어요. 흔히 생각하는 동물의 재기발랄한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이어서 오히려 눈이 갔어요. 동물을 그리는 이유가 있을까요?
초반에는 인물을 많이 그렸어요. 캐릭터가 모호하기도 하고 표정이 없는 그림을 많이 그렸죠. 그리다 보니 그림에 저를 투영하게 되잖아요. 인물을 그릴 땐 왠지 우울하고 축 처지더라고요. 그런데 동물을 그릴 때는 달랐어요. 행복해지고 마치 동물처럼 생각도 잘 안 하게 되고 그래요. 꼭 동물만 그리려고 한 것보다는 사람도 동물 중 하나잖아요.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Q. 동물 그림을 많이 그리길래 동물에 대한 각별한 애착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동물을 좋아하긴 합니다. 저도 회사생활하고 지치고 힘들 때면 동물 릴스를 많이 찾아봤어요. 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해지더라고요. 잡념도 사라져요. 그리고 동물에 대한 거부감도 없고 좋은 거 같아요.
Q. 저는 특히 병아리가 머리에 남은 입술자국을 닦고 있는 그림이 맘에 들었어요. 그 그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까요?
제가 페어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첫 번째 페어 때 병아리 그림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 병아리 그림 제목이 ‘사랑받은 병아리’ 에요. 입술자국이 사랑을 받은 표현이에요. 닦는 모습이 기분이 나빠서 닦는 게 아니냐? 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사랑받는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익숙치 않아 머쓱한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 성향이 잘 드러난 그림이죠.ㅎㅎ
Q. 그림을 보면 거의 무표정을 짓고 있어요. 이유가 있나요?
감정이 너무 과하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보시는 분들이 감정을 유추해볼 수도 있고 상황 안에 놓인 것도 ‘이런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것들도 있고 저의 취향이기도 해요.
Q. 필화 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힐링이 되고 많은 상상을 하게 돼요.
위로가 된다고들 말씀해주세요. 그럴 땐 참 감사하죠. 제 그림 속 피사체는 대개 하나거나 두 개입니다. 혼자있을 때 고독감을 느끼잖아요. 저도 그런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저를 표현하면서 해소하듯 제 이상을 동시에 담았던 거 같아요. ‘나도 위로를 받고 싶다’ ‘즐겁고 싶다’ 하는 생각을 그림으로 표출하는 게 위로로 받아 들여진 것 같아요.
Q. 화방을 다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어요. 기계공학과를 졸업해서 한 번도 제대로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직장인 클래스를 신청했어요. 한 땐 그림을 그만 두려고도 했어요. 방황하는 시기였죠. 그런데 클래스 강사였던 작가님께서 용기를 많이 주셨어요. 그 분이 판화 전공이셔서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걸 특별 수업 같이 배우기도 했고요. 진짜 감사한 분이에요.
Q. 일주일에 한 번씩 배우고 따로 개인 작업도 하는 거죠?
네, 유화, 아크릴, 판화 등을 배우고 있어요.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거에요. 디지털로 그리는 것 보다 직접 손으로 비비기도 하고 원화의 질감 그대로가 느껴지기도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스트레스 풀리는 느낌이에요.
Q,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교 때 시간도 많이 남기도 했고,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진 않았어요. ㅎㅎ 그때 당시 하고 싶은 걸 해보자! 하는 결심과 함께 그림을 그렸어요. 찰흙 같은 거 만져도 보고 나무 깎아서 조각도 만들어보고 그러면서 즐거움을 알게 되었던 거 같아요. 취미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저의 인생을 채워가고 있네요.
Q. 기계 공학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네~ ㅎㅎ 제가 기계공학과이긴 한데 기계치입니다. 어렵기도 하고요. 기계엔 정답이 있지만 그림은 정답이 없잖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정답은 없지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가는 과정인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제가 도전적인 성격이어서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즐거운 거 같아요.
Q. 그림의 코멘트를 보면 필화 님만의 위트가 돋보여요. 특히 ‘옆집 보스’와 ‘I need something stronger’(사진)는 한참 웃었는데요. 이런 위트는 타고난 걸까요?
그림을 그릴 때 제목부터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갑자기 떠오르는 어감이 재밌거나 제가 자주 쓰는 어휘에 이야기를 담아서 제목을 고릅니다. 담배피는 고양이는 창문에서 담배피는 아저씨와 창 밖에 자주 앉아 있는 고양이를 엮은 거고요. 위스키를 마시는 고양이는 제 누나가 술을 좋아하는데 어느 날 편의점에서 보드카를 사오라는 거예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나 봐요. 저는 술을 못해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렸죠.
Q. 그림 하나를 그리는데 몇 시간이나 걸리나요?
오래 걸릴 때도 있고 쓱쓱 그릴 때도 있어요. 그래도 거의 하루 안에 끝낸다고 보면 됩니다.
Q. 필화 님이 그리신 작품 중에 최애가 있다면요?
저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이기도 한데, 셔츠 주머니에 데이지를 옮겨 심은 그림이 있어요. 어머니가 시골분이시고 저도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어머니가 길에 난 들꽃 이름을 다 알고 계세요. 그 기억이 제 심리적인 자양분이 되어 주었죠.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바의 그림이기도 하고요. 향토적인, 향수가 있는 그런 그림이요.
Q. 우주로 간 라이카 그림을 보고 라이카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어요.
작업할 때 팟캐스트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듣는데 우주개발에 이용됐던 라이카에 대해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 라이카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됐는지는 은연중에 다 알고 있죠. 안타까운 마음도 컸고 ‘우주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반려동물에 대한, 그런 인식이 없었던 시대였으니까, 가장 얌전하고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환상 같은 건데 우주에서는 저희가 상상하지 못한 수많은 일이 있을테니, 우주의 시간이 멈춰서 라이키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간이 가진 죄의식을 해소하는 느낌으로요.
Q. 본가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고 들었어요.
옛날에 오일장에서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하기로 했어요.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강아지가 놀고 있는데. 구석에 시무룩하게 있는 애가 있는 거예요. 어머니는 “쟤로 하자”라고 했는데, 저는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렸어요. 부모님의 말을 이기는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결국 ‘짜리’를 데리고 왔죠. (다리가 짜리몽땅해서 짜리예요.)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활발하게 이것저것 다 뜯어버리는 거예요.ㅎㅎ 그렇게 만나, 지금은 12살이 되었네요.
Q. 그림에 그 아이의 영향도 받았을까요?
짜리를 생각하면 동물과 가까이 교감하고 있는 느낌을 받아요. 아무래도 영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모델로 그려본 적은 없어요. ㅎㅎ
後 TALK.
인터뷰를 마치고 필화 님이 선물로 건넨 포스터 다섯 장.
그 중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레고를 밟으면 많이 아파’는 현관문 바로 옆자리에서 출퇴근하는 포블스 직원들에게 아침 안부를 묻고 있다. “계단 내려갈 때 다리 조심하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