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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지터블 태닝 구두를 닮은 나의 행복
[PEOPLE] 스타일그래퍼 대표 이사금 님을 만나다
by Eugene2022.05.06
엉뚱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가 ‘구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색이 탈색되고 자연스럽게 발에 딱 맞춰진, 베지터블 태닝*한 구두.
가죽을 다루는 장인들은 안다. 베지터블 태닝한 구두는 본질적으로 동물성이었던 가죽을 식물성으로 변화시켜,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한 사람의 발에 맞춰진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을 견디고 그 속에 이야기를 품은 구두는 스스로 고유한 발색의 미를 드러낸다는 걸 말이다.
사금 님은 그런 구두를 닮았다. 세상이라는 무두질을 통해 두 발로 온전히 선 사람.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 머릿속은 아리게 발을 안아주는 오래된 구두의 고색(古色)으로 물들었다.
*베지터블 태닝 Vegetable Tanning
식물에서 추출한 타닌 엑기스를 사용한 가죽 무두질의 한 방법으로서 식물 무두질이라고도 한다.
청담동 일잘러와 남양주 수발러 사이
화장품이 즐비한 메이크업 테이블과 행거에 빼곡히 매달린 형형색색의 의상, 그리고 가지런히 열 맞춘 수십 족의 슈즈들.
사금 님의 직업은 스타일리스트다. 수 많은 스타와 셀럽들의 메이크업과 헤어, 의상까지 토털 스타일링을 진행한 ‘스타일그래퍼’의 대표인 동시에 중대형견 세마리를 돌보는 순도 100% 반려인이기도 하다.
그는 청담동 사무실에서 업무를 마치면, 차를 달려 7살 진돗개 믹스 ‘수’, 6살 시베리안 허스키 ‘하울’, 11개월 믹스 ‘얌마’가 기다리는 남양주 집으로 향한다. 트렌드 리더에서 프로 수발러로 변신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이 하나하나 돌보고, 산책시키고 나면 잠 잘 시간도 부족해요. 산책은 하울이와 수랑 한 번, 그리고 나서 얌마와 또 한 번 하거든요. 어제는 휴무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ㅎㅎ”
볼멘소리였지만, 경쾌한 음성에선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짙게 묻어난다.
그의 첫 번째 반려견은 수였다. ‘노스페이스’에서 MD로 일하다 스타일리스트로 막 독립했을 무렵, 일이 없어 집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그를 위한 남편의 제안으로 유기견 입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보호소에서 가장 선택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아이를 찾은 게 수였어요. 강아지 사진을 보고 신청을 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1살이 넘은 성견이라 속으로 흠칫 놀랐죠. 1년 전 사진이었던 거에요. 처음엔 사람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지 마음의 문을 안 열었는데, 차츰 곁을 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크한 척하던 수는 사금 님과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껌딱지로 쑥스러운 커밍아웃을 했다. 둘 사이가 샘이 났던 남편의 고집으로 하울이도 가족이 됐단다.
“수가 저만 따르니까 남편이 외로웠나봐요. 어느 날 갑자기 대구에 허스키 강아지를 보러 가자고 때를 쓰더라고요. 두 마리는 절대 안 된다고 완강하게 반대했죠. 구경만 하기로 철석같이 약속하고 대구로 내려갔는데, 강아지가 저한테 안기더니 글쎄 뽀뽀를 하는 거에요. 결국 제가 나서서 데려오고 말았죠.ㅎㅎ”
지난해 여름, 집 앞에 버려진 유기견을 임보하다가 정이 들어 가족으로 들인 얌마까지 그렇게 사금 님과 세 털뭉치 가족은 완성됐다.
괜찮아, 책임이라는 무게로 행복하니까
생의 과정 어느 것 하나 곡진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별 또한 그런 과정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다. 사금 님에겐 그 이별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찾아 왔다.
재작년 12월, 남편은 암으로 그의 곁을 먼저 떠났다.
남편은 안무가였고,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동휠에 올라 타 시속 30~40km로 하울이와 질주하기를 즐기던 애견인이었다.
두 사람은 비좁은 서울 빌라에서 생활하는 수와 하울이를 위해 독하게 절약하고 일해 마당이 있는 남양주 주택에 그들만의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금 님과 세 마리의 아이들만 함께 하고 있다.
“아이들이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냐”는 눈치없는 질문에 “그 사람의 자리를 채운다기 보다는 혼을 빼 놓는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
“저보다 아이들이 남편의 빈자리를 느낄 거에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돌봐도 남편이 했던 것처럼 못해주는 부분이 있어요. 수랑 하울이는 엄하게 가르쳐서 교육이 엄청 잘 되어 있거든요. 에너지를 100% 쓸 수 있게 운동도 함께 하고요. 그래도 아빠가 없는 걸 아는지 산책할 때 하울이는 든든하게 저를 챙겨요. 주로 산으로 운동을 가는데, 올라갈 때는 저를 끌고 가고 내려갈 때는 위험할까봐 얌전하게 천천히 간다니까요.ㅎㅎ”
개들과 함께 남양주에서 홀로 지내는 그를 주변에서 만류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님과 지인들은 모두 애들 보내고 서울로 오라고 얘기하셨어요. 만약 그랬다면 사업도 더 탄력을 받았을 거에요. 하지만 남겨진 것들을 제가 온전히 책임을 지면서 느끼는 행복이 더 크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이별을 해야 하잖아요. 이걸 큰 슬픔이나 아픔으로만 받아들이기 보다 인생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스타일링으로 세상과 만나는 방법
스타일그래퍼의 서비스 중 하나는 스타들의 화보를 일반인들이 주인공이 되어 촬영할 수 있는 ‘Let’s You Out Styling’이다. 고객과 상담을 통해 콘셉트를 기획하고 그에 맞춰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과 소품을 완벽히 세팅해 촬영하는 화보 상품이다.
사금 님은 매달 암 환우 한 명을 선정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또 다른 ‘Let’s You Out Styling’ 화보 봉사를 하고 있다. 지난달까지 벌써 5명의 암 환우에게 새로운 나와 만나도록 도움을 줬다. 남편을 추억하는 그만의 방식이 아닐까.
“처음 암 환우 화보 촬영은 단발성 이벤트였어요. 사연을 신청받고, 그 중 한 명을 뽑아 화보를 촬영했죠. 그런데 다른 분들이 맘에 걸리는 거에요. 그래서 모두 작업을 해드리기로 했죠.”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반려인과 반려동물의 특별한 화보 상품도 기획 중이다. 뻔한 반려 가족사진이 아니라, 차별화된 나와 반려동물만의 이야기를 담은 콘셉추얼한 화보를 촬영하는 경험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개나 고양이의 수명은 사람보다 짧잖아요. 결국 이별을 해야 하죠. 하울이나 수, 얌마도 마찬가지고요. 반려인과 반려동물이 함께하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스타일링 화보로 간직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일단 상품명은 ‘펫셔리’ 화보에요. 재밌겠죠? 아이디어가 좀 더 구체화되면 포블스에 먼저 알려드릴게요.ㅎㅎㅎ”
인터뷰 내내 사금 님의 품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버티던 얌마가 경쾌한 웃음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이제 다시 수와 하울이가 기다리는 보금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된 걸 알기나 한 듯.